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테 마사무네 (문단 편집) === 전술가로서 마사무네 === [[애꾸눈]]인 덕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지만, 조부인 다테 하루무네+부친에게 물려받은 오슈 탄다이직 및 북동 지역 최고+전체 수위권의 병력 동원력을 부리고도 굵직굵직한 전투 대부분에서 패배하거나 크게 밀리는 등, 군재가 그닥 뛰어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약소 가문인 오사키 가문을 상대로도 패배하고, 비슷한 전력인 사타케나 모가미를 상대로는 가문 멸망의 위기까지 몰렸다. 이렇게 마사무네의 전과가 좋지 못한 데에는 본인의 군재 부족도 있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던 것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동북 지역은 중심지에서 멀어 옛 전통이 상대적으로 잘 유지된 편인데다 서로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적대 세력을 무력화하고도 몰살시키거나 영지를 전부 빼앗지 않고, 그 대신에 가문을 유지시켜주고 영향권 안에 넣는 게 상례였다.[* 마사무네의 선조인 타네무네가 대표적인 사례로 그는 양자, 혼인 정책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오사키, 카사이, 모가미, 루스씨, 타무라씨 등 동북의 주요 세력들을 다테 가문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 그런데, 마사무네는 이러한 동북의 관습을 깨고 승자가 패자의 영지를 빼앗아 직할령으로 삼고 패자에 대한 처분을 마음대로 하던 중앙의 '최신' 정복 방식을 써먹었으니 동북 전체가 연대해 결사항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마사무네는 동북 최강의 세력을 갖고도 본인의 급진성과 부족한 군재 때문에 오래도록 애를 먹었다. 이렇다보니 뛰어난 내정 능력을 가지고도 일본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전국 과대사천왕]]에 당당하게 뽑힐 정도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동군이었던 다테 군은 서군에 속하는 우에스기 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단번에 패배했고, 결국 마사무네는 도망가는 기병들 틈에 섞여 우에스기 군의 칼날을 몇 차례나 받아야 했다. 이 때, 마사무네를 쫓던 우에스기 군의 오카 사나이[* 본명은 오카 사다토시. 우에스기 가문이 미츠나리와 함께 이에야스를 협공하기 위해 군비를 갖출 때 영입한 인물로서 유명한 수전노였지만, 나중에 우에스기 군이 전비 충당이 힘들어 곤란을 겪자 주군인 카게카츠에게 재화를 헌상하고, 우에스기가 전봉당하자 예전에 동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은 빚 문서들을 싸그리 불살라버린 호걸이었다.]는 후에 자신이 추격했던 인물이 마사무네란 사실을 알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고 한다. 게다가 마사무네가 입은 갑옷이 꽤나 명품이었다는 모양. 이 때문에 마사무네는 요네자와에 전봉된 우에스기 가문에게 내내 짓궂은 놀림을 받았다. 우에스기 가문의 지략가로 명망이 있던 [[나오에 카네츠구]]가 마사무네를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칠 일이 있었다. 일개 가로와 다이묘의 신분 차이상 카네츠구가 멈춰서 인사를 올려야 했음에도 무시하고 지나가자, 화가 난 마사무네가 나오에를 불러 세워 따졌다. 그러자 카네츠구는 "아이쿠, 마사무네 공인지 몰라 뵈었습니다. 얼굴을 뵌 적이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마사무네의 얼굴을 모를 리 없던 카네츠구가 이리 대답한 것은 '''"싸움에 지고 도망치는 뒷모습만 봐서 얼굴을 몰랐네요."'''라는 조롱이었고, 마사무네는 얼굴을 몰랐다고 사과하는 상대에게 따질 수도 없어서 얼굴만 붉힌 채 자리를 떴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사카 전투|오사카 여름 전투]]에선 전초전부터 양측 주력 부대가 갑작스럽게 조우하는 예상 외의 일이 발생했는데, [[사나다 노부시게]]는 이런 무의미한 전투로[* 당시 유키무라는 처음부터 이에야스의 본진을 노리는 작전을 세웠다.] 병력상의 피해가 발생함을 막기 위해 부대를 다급히 후퇴시켰다. 만약 이때 다테 마사무네가 마음 먹고 추격전을 벌였다면 유키무라 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겠지만, 마사무네는 유키무라를 두려워한 나머지 공격을 포기하고 전황을 관망하는 쪽을 택했다. 또한 당시 유키무라는 아군의 사기도 올릴 겸 다테 진영을 향해 "관동 무사 중엔 한 사람도 사내가 없느냐!" 하며 마구 조롱했을 정도.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무사에게 겁쟁이라는 말만큼 지독한 욕설도 없다. 하지만 마사무네로서는 내심 유키무라가 이에야스를 잡아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테니 단순히 유키무라가 무서워서 덤비지 못했다고 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나마 내세울 만한 부분이 있다면 말 위에서 [[화승총]]을 쏘는 [[용기병|기마 철포대]]를 만들었다는 것 정도이다. 모 게임 등에서 다테 가문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지만, 사실 실제 운용은 오사카 여름의 진 딱 한 번밖에 없다. 이조차 그 전투에서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크게 패배하여 두 번 다시는 운용하지 않는다. 얼핏 생각하면 기병의 돌진력에 화승총의 화력이 더해지니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부대가 탄생할 것 같지만, 당시 화승총은 이동하면서 사격할 만한 물건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권총인 피스톨이 일본엔 없었다.] 기존보다 기동력이 우수해진 화승총 부대에 불과했다. 실제 운용을 살펴보면 말을 타고 달려가서 ''말에서 내린 후'' 총을 사격하여 적진을 교란하고, 이후 보병들과 함께 근접돌격을 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스즈키 마사야의 일본의 기마 군단 돌격 부재 설에 따르면, 보병들과 함께 말에서 내려서 근접돌격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조실록 등에 나온 일본 기병의 모습처럼.]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묘지 전투에서 이 기마 철포대를 적극적으로 전면에 내세우는데, 일단 [[고토 모토츠구]]의 병력이 괴멸당하자 구원을 온 [[사나다 노부시게]], [[모리 카츠나가]] 등을 상대로 카타쿠라 시게나가가 기마철포대를 포함한 군대로 반격하나, 사나다 유키무라가 창병들을 이끌고 측면을 공격하여 크게 패배한다. 당시 사나다 유키무라는 조총으로는 누운 적을 명중시키기 어렵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바닥에 붙은 채 창으로 말을 찌르는 전술을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상대가 중국이나 유럽의 기마대였다면 바닥에 누워있어 봤자 기마대 특유의 돌진력에 처참히 짓밟힐 뿐이었겠지만, 돌진을 하지 않으며 싸울 때는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 일본식 기병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왜냐면 일본은 기병 전술이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보니 명나라 기병한테 붙는 족족 박살이 났다. 그 이유는 일본의 군마는 조선이나 명의 군마에 비해 너무 작았다. 그 때문에 기마돌격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조선군이나 명군의 기병이 [[전차]]였다면 일본군의 기병은 [[기계화보병]]에 가까웠다.] 가능했던 일. 결국 사실 기마 철포에서 '''기마''' 부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 된다.[* 다만 [[용기병]]을 생각해보면 기마대가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당시 일본의 전투 환경에 용기병식 전술이 그렇게까지 필요하지는 않았을 듯. 사실 용기병식 전술은 유럽처럼 상대가 선형진을 폈을 때나 쓸모가 있다.] 그렇게 봤을 때 이 기마 철포대가 진정으로 대단한 건 '기마 철포대'라는 발상이 아니라, '''그 발상을 진짜로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 있다.''' 기마 한 마리를 유지하는 비용이 일반 보병의 3배에 달하는 시대에 기마 철포대까지 창설했다는 건 그만큼 다테 마사무네가 엄청난 국력을 보유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군마가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 그의 영지였다는 것도 한 몫 했겠지만 말이다. 물론 오사카 전투 이후에 다테 가문에서 기마 철포를 양성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